노팅엄 포리스트 FC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노팅엄 포리스트 FC는 1865년 창단된 잉글랜드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 홈 구장은 시티 그라운드이다. 1898년과 1959년 FA컵, 1978, 1979, 1989, 1990년 풋볼 리그 컵에서 우승했으며, 1978-79, 1979-80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스트 미들랜즈 더비에서 더비 카운티 FC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022년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리미어리그 구단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878년 철도 직원들이 창단한 뉴턴 히스 LYR F.C.에서 시작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1902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 후 올드 트래퍼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잉글랜드 축구 리그에서 활동, 알렉스 퍼거슨 감독 시절 전성기를 누린 세계적인 인기 클럽이며 여러 팀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 프리미어리그 구단 - 리버풀 FC
리버풀 FC는 1892년 존 호울딩에 의해 창단되어 잉글랜드 프로 축구 클럽으로, 1900년대 초반 1부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유러피언컵, 프리미어리그 등에서 우승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 노팅엄 포리스트 FC - 니콜라 밀렌코비치
니콜라 밀렌코비치는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로, 파르티잔에서 프로 데뷔 후 피오렌티나를 거쳐 현재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활동하며 세르비아 국가대표팀으로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에 출전했다. - 노팅엄 포리스트 FC - 시티 그라운드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홈 구장인 시티 그라운드는 1898년 개장하여 트렌트 강변에 위치하며, 여러 차례 재개발을 거쳐 약 30,000명을 수용하고 UEFA 유로 1996 경기를 개최했으며, 2019년부터 재개발 계획이 추진 중인 잉글랜드 노팅엄의 축구 경기장이다.
노팅엄 포리스트 FC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포리스트 더 레즈 (The Reds) 더 트리키 트리스 (The Tricky Trees) 더 가리발디 (The Garibaldi) |
창단 | 1865년 |
홈구장 | 시티 그라운드 |
수용 인원 | 30,455명 |
구단주 |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
회장 | 니컬러스 랜들 KC |
감독 | 누누 이스피리투 산투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경기장 | |
![]() | |
위치 | 노팅엄 |
현재 시즌 | |
리그 | 프리미어리그 |
시즌 | 2024-25 시즌 |
지난 시즌 순위 | 17위 (2023-24 시즌) |
유니폼 정보 | |
홈 유니폼 | pattern_la1: _nottingham2425h pattern_b1: _nottingham2425h pattern_ra1: _nottingham2425h pattern_sh1: _nottingham2425h pattern_so1: leftarm1: EF0000 body1: EF0000 rightarm1: EF0000 shorts1: FFFFFF socks1: EF0000 |
원정 유니폼 | pattern_la2: _nottingham2425a pattern_b2: _nottingham2425a pattern_ra2: _nottingham2425a pattern_sh2: _nottingham2425a pattern_so2: _nottingham2425al leftarm2: 000060 body2: 000060 rightarm2: 000060 shorts2: 000060 socks2: 000060 |
세 번째 유니폼 | pattern_la3: _nottingham2425t pattern_b3: _nottingham2425t pattern_ra3: _nottingham2425t pattern_sh3: _nottingham2425t pattern_so3: leftarm3: 80BFFF body3: 80BFFF rightarm3: 80BFFF shorts3: FFFFFF socks3: 80BFFF |
관련 부서 | |
활동 부서 | 축구 (남자) 축구 B (남자) 축구 U-18 (남자) 축구 (여자) 네트볼 |
2. 역사
노팅엄 포리스트 FC는 1865년, 신티 선수들이 노팅엄의 셰익스피어 스트리트와 노스 셰르우드 스트리트 교차로에 위치한 클린턴 암스(현재 The Playwright)에서 만나 협회 축구를 하자는 제안과 함께 결성되었다.[3] 이 회의에서 클럽은 주세페 가리발디 레드 색상의 술 장식이 달린 모자 12개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여 클럽의 공식 색상이 정해졌다.[3] 포리스트의 첫 공식 경기는 1866년 3월 22일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치러졌다.[6] 1870년 4월 23일, 팀의 첫 리그 경기가 있었고, 윌리엄 헨리 레비스가 첫 골을 넣었다.[7]
초창기 노팅엄 포리스트는 멀티 스포츠 클럽이었으며, 야구 클럽은 1899년에 영국 챔피언이었다.[8] 포레스트는 리버풀, 아스널, 브라이튼 등의 클럽 창단에 기여했다. 특히 1886년 아스널 창단에 축구 유니폼을 기증하여 노스 런던 팀은 여전히 빨간색 유니폼을 입는다.[3]
1878–79 시즌 FA컵에 처음 참가하여 1라운드에서 노츠 카운티를 3-1로 꺾었으나, 준결승에서 올드 이토니언스에게 2-1로 패했다.[6] 1888년 풋볼 리그 가입이 거부되었고,[6] 1889년 풋볼 얼라이언스에 합류, 1892년에 우승하여 풋볼 리그에 참가했다.[6] 1897–98 시즌, 1898 FA컵 결승전에서 아서 케이프스의 두 골과 존 맥퍼슨의 골로 더비 카운티를 3-1로 꺾고 FA컵 첫 우승을 차지했다.[9]
1900년과 1902년 FA컵 준결승에서 패배 후, 1905-06 시즌 처음으로 강등되었다. 그렌빌 모리스는 클럽 통산 최다 득점자(213골)가 되기까지 5시즌 동안 팀 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했다. 1906-07 시즌 챔피언으로 승격했으나 1911년 다시 강등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위원회 위원들의 호의로 클럽은 존속할 수 있었다.[6] 1919년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확장 시도에 실패했고, 1921-22 시즌 챔피언으로 승격했다. 1924-25 시즌 다시 강등되어 1949년 풋볼 리그 서드 디비전으로 강등될 때까지 2부 리그에 머물렀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노팅엄 포리스트는 잉글리시 풋볼 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 주장되었다. 노츠 카운티가 리그에서 강등된 후 스토크 시티가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 주장했지만, 축구 역사학자 마크 메트칼프는 스토크가 1868년에 결성되었다고 밝혔고, EFL 또한 노팅엄 포리스트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밝혔다.[4][5]
2. 1. 창단과 초기 (1865-1949)
1865년, 신티 선수들이 노팅엄의 셰익스피어 스트리트와 노스 셰르우드 스트리트 교차로에 위치한 클린턴 암스(현재 The Playwright)에서 만나 협회 축구를 하자는 제안과 함께 노팅엄 포리스트 FC가 결성되었다.[3] 이 회의에서 클럽은 가리발디 레드 색상의 술 장식이 달린 모자 12개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여 클럽의 공식 색상이 정해졌다.[3] 포리스트의 첫 공식 경기는 1866년 3월 22일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치러졌다.[6] 1870년 4월 23일, 팀의 첫 리그 경기가 있었고, 윌리엄 헨리 레비스가 첫 골을 넣었다.[7]초창기 노팅엄 포리스트는 멀티 스포츠 클럽이었으며, 야구 클럽은 1899년에 영국 챔피언이었다.[8] 포레스트는 리버풀, 아스널, 브라이튼 등의 클럽 창단에 기여했다. 특히 1886년 아스널 창단에 축구 유니폼을 기증하여 노스 런던 팀은 여전히 빨간색 유니폼을 입는다.[3]
1878–79 시즌 FA컵에 처음 참가하여 1라운드에서 노츠 카운티를 3-1로 꺾었으나, 준결승에서 올드 이토니언스에게 2-1로 패했다.[6] 1888년 풋볼 리그 가입이 거부되었고,[6] 1889년 풋볼 얼라이언스에 합류, 1892년에 우승하여 풋볼 리그에 참가했다.[6] 1897–98 시즌, 1898 FA컵 결승전에서 아서 케이프스의 두 골과 존 맥퍼슨의 골로 더비 카운티를 3-1로 꺾고 FA컵 첫 우승을 차지했다.[9]
1900년과 1902년 FA컵 준결승에서 패배 후, 1905-06 시즌 처음으로 강등되었다. 그렌빌 모리스는 클럽 통산 최다 득점자(213골)가 되기까지 5시즌 동안 팀 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했다. 1906-07 시즌 챔피언으로 승격했으나 1911년 다시 강등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위원회 위원들의 호의로 클럽은 존속할 수 있었다.[6] 1919년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확장 시도에 실패했고, 1921-22 시즌 챔피언으로 승격했다. 1924-25 시즌 다시 강등되어 1949년 풋볼 리그 서드 디비전으로 강등될 때까지 2부 리그에 머물렀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노팅엄 포리스트는 잉글리시 풋볼 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 주장되었다. 노츠 카운티가 리그에서 강등된 후 스토크 시티가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 주장했지만, 축구 역사학자 마크 메트칼프는 스토크가 1868년에 결성되었다고 밝혔고, EFL 또한 노팅엄 포리스트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밝혔다.[4][5]
2. 2. 재도약과 몰락 (1950-1974)
노팅엄 포리스트는 1950-51 시즌에 2년 만에 110골을 기록하며 챔피언으로 다시 승격했고, 1957년에 1부 리그로 복귀했다.[6] 조니 퀴글리는 1958-59 FA컵 준결승에서 애스턴 빌라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다.[6] 빌리 워커의 포리스트는 1959 FA컵 결승전에서 루턴 타운을 2-1로 꺾었다. 이 경기에서 로이 드와이트(엘튼 존의 사촌)가 브렌단 맥낼리와의 태클로 다리가 부러지는 등 선수들의 부상으로 많은 중단 시간을 가졌다.[11] 포리스트는 칙 톰슨 골키퍼의 활약으로 1950년대 웸블리 징크스를 깨고 우승을 차지했다.[11] 구단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 바비 맥킨레이는 잭 버킷이 주장하는 이 결승 우승팀에서 뛰었다.이후 포리스트는 노팅엄에서 노츠 카운티를 제치고 가장 큰 클럽이 되었다. 조니 캐리 감독은 조 베이커와 이안 스토리-무어를 포함한 팀을 구성하여 1966-67 풋볼 리그 타이틀 경쟁을 벌였다.[12] 1966년 10월 1일 시티 그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4-1로 꺾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12] 결국 부상으로 인해 리그 준우승에 그쳤고, FA컵 준결승에서도 데이브 매케이의 토트넘 홋스퍼에게 패했다.[6]
1966-67 시즌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구단의 열악한 축구 관리와 독특한 위원회 구조, 아마추어리즘 등으로 인해 팀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최고 리그에서 강등되었고,[6] 맷 길리스 감독 사임 이후 앨런 브라운 등이 감독직을 맡았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
2. 3. 브라이언 클러프 시대 (1975-1993)

브라이언 클러프는 1975년 1월 6일,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직에서 44일 만에 물러난 지 12주 만에 포리스트의 감독이 되었다.[14] 클러프는 더비 카운티와 리즈에서 함께했던 지미 고든을 클럽 트레이너로 데려왔다.[15] 클러프가 부임했을 당시 포리스트는 잉글랜드 축구 2부 리그에서 13위에 머물렀고, 그 시즌을 16위로 마쳤다.
클러프는 이안 보이어, 존 맥거번, 존 오헤어, 콜린 바렛, 존 로버트슨, 마틴 오닐, 비브 앤더슨 등을 영입하거나 중용하며 팀을 재정비했다. 프랭크 클라크는 그 시즌이 끝나고 자유 계약으로 영입되었다.[19] 1975–76 풋볼 리그에서 포리스트는 클러프가 지휘한 첫 풀 시즌에서 8위를 기록했다.[14]
피터 테일러가 1976년 7월 16일 클러프의 수석 코치로 합류하며[14] 더비 카운티 시절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테일러는 선수 평가를 통해 존 로버트슨의 체중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시켰으며, 토니 우드콕을 2군 미드필더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 공격수로 성장시켰다.[23] 또한 피터 위드, 개리 버틀스, 래리 로이드 등을 영입하여 팀 전력을 강화했다.
클러프와 테일러는 함께 포리스트를 새로운 정점으로 이끌었다. 1976년 12월, 1976–77 앵글로-스코티시 컵 결승전에서 오리엔트를 합계 5–1로 꺾고 우승하며 클럽의 첫 번째 실버웨어를 획득했다.[14] 1977년 5월, 포리스트는 1976–77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에서 3위를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6][14]
케니 번스를 영입하고,[30][31] 피터 쉴턴을 당시 골키퍼 최고 이적료로 영입하며[33] 전력을 강화한 포리스트는 1977–78 풋볼 리그에서 준우승팀 리버풀보다 7점 앞선 1위로 우승했다.[36][37][38] 이는 2부 리그에서 승격한 다음 시즌에 1부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몇 안 되는 팀 중 하나(그리고 현재까지 가장 최근의 팀)가 되었다.[36][37][38] 또한 1978 풋볼 리그 컵 결승전 재경기에서 리버풀을 1–0으로 이기며 리그 컵 우승도 차지했다.[26][41]

1978–79 시즌, 포리스트는 1978–79 유러피언 컵에서 지난 두 시즌 우승팀인 리버풀을 꺾고,[42] 결승전에서 말뫼를 1–0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다.[45] 1979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FC 바르셀로나를 합계 2–1로 꺾고 우승했으며,[46] 1979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서 사우스햄튼을 3-2로 꺾고 리그 컵 2연패를 달성했다. 1978–79 풋볼 리그에서는 리버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979–80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함부르크를 1–0으로 꺾고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달성했다.[48][49] 그러나 1979–80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서는 울브스에게 패하며 3연속 리그 컵 우승에는 실패했다.[47] 1979–80 풋볼 리그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1980년대 초, 포리스트는 1980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발렌시아에게 패하고,[50] 1980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에게 패하는 등[51] 국제 대회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리그와 유러피언 컵 우승 멤버들이 해체되고[15] 재건된 팀은 트로피 경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83–84 UEFA 컵 준결승전에서 안데를레흐트에게 논란 속에 패했다.[53] 10년 후, 경기 전 심판이 안데를레흐트 회장에게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이 증폭되었다.[54]
1988년, 풋볼 리그 센테나리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승부차기로 꺾고 우승했다.[55] 1989년, 풀 멤버스 컵과 리그 컵에서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지만, 힐스보로 참사로 인해 FA컵 준결승전에서 리버풀에게 패했다.
1990년, 리그 컵에서 올덤 애슬레틱을 꺾고 우승하며 리그 컵 2연패를 달성했다. 1991년, FA 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토트넘 홋스퍼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58] 1992년, 풀 멤버스 컵에서 우승했지만, 리그 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며 준우승했다.
1992-93 시즌, 포리스트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되었고, 브라이언 클러프의 18년간의 감독 경력은 막을 내렸다.[59]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유럽 대항전 / 기타 | 최다 득점자 | |||||||||||
---|---|---|---|---|---|---|---|---|---|---|---|---|---|---|---|---|
디비전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승점 | 순위 | 선수 | 득점 | ||||||
1977-78 | 1부 리그 | 42 | 25 | 14 | 3 | 69 | 24 | 64 | 1위 | 8강 탈락 | 우승 | 피터 위스 토니 우드콕 | 19 | |||
1978-79 | 42 | 21 | 18 | 3 | 61 | 26 | 60 | 2위 | 5라운드 탈락 | 우승 | 유러피언컵 | 우승 | 개리 바틀스 | 26 | ||
1979-80 | 42 | 20 | 8 | 14 | 63 | 43 | 48 | 5위 | 5라운드 탈락 | 준우승 | 유러피언컵 | 우승 | 존 로버트슨 | 19 | ||
1980-81 | 42 | 19 | 12 | 11 | 62 | 44 | 50 | 7위 | 8강 탈락 | 4라운드 탈락 | 유러피언컵 | 1라운드 탈락 | 13 | |||
1981-82 | 42 | 15 | 12 | 15 | 42 | 48 | 57 | 12위 | 3라운드 탈락 | 5라운드 탈락 | 12 | |||||
1982-83 | 42 | 20 | 9 | 13 | 62 | 50 | 69 | 5위 | 3라운드 탈락 | 5라운드 탈락 | 17 | |||||
1983-84 | 42 | 22 | 8 | 12 | 76 | 45 | 74 | 3위 | 3라운드 탈락 | 2라운드 탈락 | UEFA컵 | 4강 탈락 | 17 | |||
1984-85 | 42 | 19 | 7 | 16 | 56 | 48 | 64 | 9위 | 4라운드 탈락 | 3라운드 탈락 | UEFA컵 | 1라운드 탈락 | 17 | |||
1985-86 | 42 | 19 | 11 | 12 | 69 | 53 | 68 | 8위 | 3라운드 탈락 | 4라운드 탈락 | 나이젤 클러프 | 18 | ||||
1986-87 | 42 | 18 | 11 | 13 | 64 | 51 | 65 | 8위 | 3라운드 탈락 | 5라운드 탈락 | 17 | |||||
1987-88 | 40 | 20 | 13 | 7 | 67 | 39 | 73 | 3위 | 4강 탈락 | 3라운드 탈락 | 22 | |||||
1988-89 | 38 | 17 | 13 | 8 | 64 | 43 | 64 | 3위 | 4강 탈락 | 우승 | 21 | |||||
1989-90 | 38 | 15 | 9 | 14 | 55 | 47 | 54 | 9위 | 3라운드 탈락 | 우승 | 스티브 호지 | 14 | ||||
1990-91 | 38 | 14 | 12 | 12 | 65 | 50 | 54 | 8위 | 준우승 | 4라운드 탈락 | 나이젤 클러프 | 20 | ||||
1991-92 | 42 | 16 | 11 | 15 | 60 | 58 | 59 | 8위 | 8강 탈락 | 준우승 | 테디 셰링엄 | 22 | ||||
1992-93 | 프리미어리그 | 42 | 10 | 10 | 22 | 41 | 62 | 40 | 22위 | 5라운드 탈락 | 5라운드 탈락 | 나이젤 클러프 | 12 |
2. 4. 클러프 이후 (1993-2012)
프랭크 클라크는 1993년 5월 브라이언 클러프의 후임으로 노팅엄 포리스트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클라크는 스튜어트 피어스를 설득하여 클럽에 잔류시켰고, 스탠 콜리모어, 라르스 보히넨, 콜린 쿠퍼를 영입했다. 클라크는 1993-94 시즌 종료 시 팀이 1부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곧바로 프리미어리그 복귀를 이끌었다.[60] 포리스트는 1994-95 시즌에 3위를 기록했고[61], UEFA컵 진출 자격을 얻었다. 이는 헤이젤 참사 이후 유럽 대회 첫 진출이었다. 이후 콜리모어는 1995-96 시즌 종료 후 850만 파운드의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포리스트는 1995-96 UEFA컵 8강에 진출하여, 그 시즌 UEFA 대회에서 잉글랜드 팀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리그에서는 9위를 기록했다.1996-97 시즌은 곧 강등 경쟁으로 이어졌다. 클라크는 12월에 클럽을 떠났다.[62] 34세의 주장 스튜어트 피어스는 1996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임시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되어 구단의 운명을 잠시나마 호전시켰다. 그러나 1997년 3월, 그는 데이브 바셋으로 정식 교체되었고, 그해 여름 12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클럽을 떠났다.[63] 포레스트는 강등을 피하지 못하고 시즌을 최하위로 마감했다.[64] 그들은 1997-98 시즌에 디비전 1 챔피언에 오르며 첫 번째 시도에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다.[65] 바셋은 1999년 1월에 해고되었고, 론 앳킨슨이 그의 뒤를 이었다.[66][67] 론 앳킨슨은 포레스트가 다시 한 번 디비전 1으로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1999년 4월 24일 프리미어 리그 시즌 3주를 남겨두고 포레스트의 강등이 확정되자 축구 감독직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전 잉글랜드 주장 데이비드 플랫은 앳킨슨의 뒤를 이어 두 시즌 동안 약 1,200만 파운드를 선수 영입에 투자했는데, 여기에는 이탈리아 베테랑 모레노 만니니, 살바토레 마트레카노, 잔루카 페트라키 등이 포함되었다.[68] 하지만 플랫의 첫 시즌에서 포레스트는 14위, 두 번째 시즌에서 11위에 그쳤다. 그는 2001년 7월 잉글랜드 U-21 대표팀을 지휘하기 위해 떠났고, 유소년 팀 감독 폴 하트가 그의 뒤를 이었다.[69]
이제 포레스트는 새로운 선수 영입 능력을 저하시키는 막대한 부채에 직면했고, 하트가 지휘한 첫 시즌에서 16위를 기록했다.[70] 2001년 12월까지 포레스트는 매주 10만 파운드 이상을 손실하고 있다고 보고되었고,[71] ITV 디지털의 붕괴로 인해 재정 전망이 악화되었으며, 이는 포레스트와 다른 많은 풋볼 리그 클럽들을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빠뜨렸다.[72] 경기장 밖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레스트는 2002–03 시즌을 6위로 마쳤고[73]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준결승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패했다. 여러 핵심 선수들의 이탈 이후 다음 시즌의 부진한 리그 성적으로 인해 2004년 2월 하트가 해고되었고, 포레스트는 강등 위기에 놓였다.[74] 이 결정은 팬들의 일부에게 인기가 없었고 하트는 "희생양"으로 묘사되었다.[75]
조 키니어가 그 후 임명되어 최종 리그 순위에서 클럽을 14위로 안전하게 이끌었다.[76] 2004–05 시즌에 포레스트는 다시 강등권으로 떨어졌고, 이는 2004년 12월 키니어의 사임으로 이어졌다.[77] 미크 하포드는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포레스트를 임시로 지휘했고, 게리 멕슨은 새해에 임명되었다. 멕슨은 이전 클럽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에서 이미 프리미어 리그로 두 번 승격시킨 경험이 있었고, 그들이 디비전 2로 강등될 위기에 처했을 때 클럽에 합류했지만, 클럽이 시즌을 23위(하위 두 번째)로 마치면서 강등을 막지 못했고,[78] 자국 3부 리그로 떨어진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팀이 되었다.[79]
포레스트가 54년 만에 잉글랜드 3부 리그에서 첫 시즌을 치른 2006년 2월 올덤 애슬레틱에서 3-0으로 패한[80] 후 멕슨은 "상호 합의"에 따라 팀을 떠났고, 클럽은 중위권에 머물렀으며 강등권에서 단 4점 앞서 있었다.[81] 프랭크 바로우와 이안 맥파랜드는 2005–06 시즌의 남은 기간 동안 임시로 지휘를 맡았고, 6경기 연속 승리 행진과 10경기 무패 행진을 이루어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는 스윈던 타운을 7-1로 이긴 것이었다.[82] 포레스트는 이 두 사람의 지휘 아래 39점 중 28점을 얻었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아깝게 놓치며 7위로 시즌을 마쳤다.[83]
콜린 칼더우드는 이전에 노샘프턴 타운에서 감독을 맡았으며, 2006년 5월 포레스트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3년 전 브라이언 클러프가 은퇴한 이후 12번째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프랭크 클라크 이후 포레스트에서 가장 오랫동안 감독으로 재직했다. 칼더우드 시대는 궁극적으로 재건의 시대였고, 클럽의 10년 만의 첫 승격을 포함했다. 그는 첫 시즌에 리그 원에서 2006년 11월까지 7점 차 선두를 잃었지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포레스트는 결국 요빌 타운과의 준결승에서 충격적인 합계 5-4 패배를 당했다. 그들은 휴이시 파크에서 열린 1차전에서 2-0으로 앞섰지만, 서머싯 클럽에게 홈에서 5-2로 패했다.[84] 칼더우드는 클럽에서 두 번째 해에 자동 승격을 달성했는데, 포레스트가 시즌 마지막 7경기 중 6경기에서 승리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시티 그라운드에서 요빌 타운과의 극적인 마지막 3-2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포레스트는 46경기 중 24경기에서 클린 시트를 기록하며 잉글랜드 축구 2부 리그로의 복귀의 기반을 다졌고, 프리미어 리그로의 복귀까지 단 한 번의 승격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칼더우드의 팀은 2008–09 시즌 챔피언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포레스트를 강등권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면서 칼더우드는 챔피언십 최하위 팀 돈캐스터 로버스에게 4-2로 패한 박싱 데이 이후 해고되었다.[85]
존 펨버턴의 임시 지휘 아래, 포레스트는 노리치 시티를 3-2로 이기면서 마침내 강등권에서 벗어났다.[86] 빌리 데이비스는 2시즌 전 포레스트의 지역 라이벌인 더비 카운티를 프리미어 리그로 이끌었고, 2009년 1월 1일 새로운 감독으로 확정되었으며[87] 펨버턴의 팀이 맨체스터 시티를 FA컵에서 3-0으로 이기는 것을 지켜보았다.[88]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포레스트는 칼더우드의 해고 이후 모든 대회에서 6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갔고, 그 중 5번 승리했다. 그는 또한 클럽이 챔피언십에서 19위를 기록하며 강등을 면하는 데 기여했으며,[89]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잔류를 확정지었다.
포레스트는 2009–10 시즌의 대부분을 상위 3위 안에 머물면서 19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했고, 리그 홈 12연승(단일 시즌 최다 홈 연승 클럽 기록)을 기록했으며, 시즌 시작부터 2010년 1월 30일까지 원정 경기 무패 행진(13경기)을 기록하는 동시에 지역 라이벌 더비 카운티와 레스터 시티를 상대로 기억에 남는 홈 승리를 거두었다. 클럽은 3위로 시즌을 마쳤고, 자동 승격에는 실패했으며, 2차전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블랙풀에게 원정 2-1, 홈 4-3으로 패했다. 이는 2009년 9월 같은 상대를 상대로 패한 이후 클럽의 첫 홈 패배였다.

2010–11 시즌에 포레스트는 75점을 얻어 챔피언십 순위에서 6위를 기록했고,[90] 8년 만에 네 번째 플레이오프 캠페인에 진출했다. 포레스트는 다시 한 번 승격을 놓쳤고, 최종 플레이오프 결승전 우승팀 스완지 시티에게 2차전 합계로 패했다. 시티 그라운드에서 열린 1차전에서 0-0으로 비긴 후,[91] 2차전에서 3-1로 패했다.[92]
2011년 6월, 빌리 데이비스는 계약이 해지되었고,[93][94] 스티브 맥클라렌이 감독으로 교체되어 3년 계약을 체결했다.[95][96] 포레스트는 2011–12 시즌을 몇 차례 부진한 결과로 시작했고, 번리에게 원정에서 5-1로 패한 후 데이비드 플리트와 빌 베즈윅이 클럽의 코칭진에서 물러났다.[97] 일주일도 채 안 되어 버밍엄 시티에게 홈에서 패한 후 맥클라렌이 사임했고, 회장 나이젤 도티는 시즌 말에 사임할 의향을 발표했다.[97] 2011년 10월, 노팅엄 포레스트는 몇 가지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프랭크 클라크의 새로운 클럽 회장 임명과 최근 떠난 스티브 맥클라렌을 대신하여 스티브 코터릴의 임명이 포함되었다.[98]

1990년대 후반부터 클럽과 함께 해왔고, 그의 총 기여액이 약 1억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클럽의 구단주이자 전 회장인 나이젤 도티가 2012년 2월 4일 사망했다.
2. 5. 알 하사위 가문 시대 (2012-2017)
알-하사위 가문은 2012년 7월에 노팅엄 포리스트 FC를 인수했다.[104] 그들은 언론에 3~5년 계획을 기반으로 클럽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2012년 7월 19일, 이전에 돈캐스터 로버스와 크롤리 타운의 감독이었던 숀 오드리스콜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매력적인 패스 축구 스타일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104]2012년 12월 15일, 팀이 브라이튼과의 원정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후, 포리스트는 승점 33점으로 9위에 올랐고, 플레이오프 진출권과 불과 3점 차였다. 같은 주말, 클럽은 오마르 알-하사위가 개인적인 이유로 사임했고, 75%의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인 파와즈 알-하사위가 그 자리를 맡았다고 발표했다.[99]
2012년 12월 26일, 오드리스콜은 리즈 유나이티드를 4-2로 이긴 후 해고되었으며,[100] 클럽은 1월 이적 시장을 앞두고 변화를 꾀하고 프리미어 리그 경험이 있는 감독을 임명하려는 의사를 밝혔다.[101] 결국 알렉스 맥클리시를 고용했으나,[101] 2013년 2월 5일, 포리스트와 맥클리시는 40일 만에 상호 합의하에 결별했다.[103] 언론인 팻 머피는 이 상황을 "엉망진창"이라고 묘사했다.[105]

맥클리시가 떠난 지 이틀 후, 클럽은 빌리 데이비스를 다시 감독으로 임명했다.[106] 2014년 3월, 클럽은 더비 카운티에 5-0으로 패한 후 데이비스를 해고했다.[108] 이후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튜어트 피어스가 2014년 7월 1일부터 2년 계약을 체결하며 감독직을 맡았다.[109] 피어스는 시즌 초반 팀을 무패로 이끌었지만, 그 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2015년 2월에 해고되었고, 더기 프리드먼으로 교체되었다.
2015-16 시즌에도 포리스트는 챔피언십에 머물렀다. 2016년 3월 13일, 프리드먼은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홈 경기에서 3-0으로 패한 후 해고되었고,[110] 폴 윌리엄스가 임시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 6월 27일, 필리프 몽타니에가 2년 계약을 체결하며 영국 제도 밖에서 온 클럽 최초의 감독이 되었지만, 7개월도 안 되어 해고되었다. 마크 워버튼은 2017년 3월 14일에 클럽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포리스트는 2016-17 시즌 마지막 날에 입스위치 타운과의 3-0 홈 승리를 통해 블랙번 로버스를 희생시키고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111]
2. 6. 에반젤로스 마리나키스 시대 (2017-현재)
에반젤로스 마리나키스는 2017년 5월 18일 노팅엄 포리스트 인수를 완료했다.[112] 마리나키스 인수 당시 감독이었던 마크 워버튼은 2017년 12월 31일 경질되었고,[113] 2018년 1월 아이토르 카랑카가 후임으로 부임했다.[114] 카랑카 감독 부임 후, 2018년 겨울과 여름 이적시장에서 각각 10명, 14명의 선수가 영입되었다.[115][116] 2019년 1월, 카랑카 감독은 계약 해지를 요청하여 팀을 떠났고,[117] 마틴 오닐이 그 뒤를 이었다.[118] 오닐 감독은 선수단과의 불화로 6월에 경질되었으며, 사브리 라무시가 같은 날 부임했다.[119] 라무시 감독 체제에서 포리스트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렸으나, 마지막 날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120] 2020년 10월, 라무시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121] 크리스 휴튼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122] 그러나 휴튼 감독 또한 2021-22 시즌 개막 후 7경기 무승의 부진으로 2021년 9월 경질되었다.[123]구단 회장 니콜라스 랜드는 포리스트의 유럽 축구 복귀를 약속했지만, 선수 영입 실패와 구단 문화 문제로 챔피언십에 머물렀다.[124] 2021년 여름, 구단은 데인 머피를 CEO로, 조지 시리아노스를 영입 책임자로 임명하여 이적 정책을 개편했다.[125]
2021년 9월, 스티브 쿠퍼가 감독으로 부임하여[126] 팀을 2010-11 시즌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127] 2022 챔피언십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허더즈필드 타운을 꺾고 1998-99 시즌 이후 첫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128][129] 승격 이후 포리스트는 21명의 선수를 영입하며 영국 이적 기록을 경신했고,[130] 모건 깁스-화이트 영입으로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갱신했다.[131]
2022년 10월, 쿠퍼 감독과 3년 재계약을 체결했으나,[132] 2023년 4월, 성적 부진으로 스포츠 디렉터 필리포 지랄디가 경질되었다.[134] 2023년 5월, 포리스트는 아스널전 승리로 프리미어 리그 잔류를 확정지었다.[135] 2023년 12월, 쿠퍼 감독은 경질되고 누누 이스피리투 산투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136]
2024년 1월, 포리스트는 프리미어 리그 수익 및 지속 가능성 규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137] 3월에는 승점 4점 삭감 징계를 받았다.[138] 구단은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139][140] 2024년 5월, 포리스트는 번리전 승리로 프리미어 리그 잔류를 확정했다.[141][142]
2024년 10월, VAR 심판 스튜어트 앳우드의 소셜 미디어 발언에 대해 구단에 75만 파운드의 벌금이 부과될 것이라고 발표되었으며, 구단은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143][144]
3. 경기장
3. 1. 시티 그라운드
1898년부터 노팅엄 포레스트는 트렌트 강(River Trent) 기슭의 웨스트 브리지퍼드에 있는 시티 그라운드를 홈 구장으로 사용해 왔다. 시티 그라운드로 이전하기 전, 포레스트는 포레스트 레크리에이션 그라운드, 트렌트 브리지, 타운 그라운드를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 1994년부터 시티 그라운드는 전 좌석 구장으로 바뀌었고, 유로 96의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수용 인원은 30,404명이다.
시티 그라운드는 노츠 카운티 FC의 메도우 레인 경기장과 트렌트 강 건너편으로 300야드 거리에 있어, 두 경기장은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프로 축구 경기장이다. 1898년 당시 시티 그라운드는 도시 지위를 받은 노팅엄의 경계 안에 있었지만, 1950년대에 경계가 변경되면서 현재 시티 그라운드는 노팅엄 시 경계 바로 바깥, 웨스트 브리지퍼드 타운에 위치해 있다.
2019년 2월 28일, 노팅엄 포레스트는 시티 그라운드와 주변 지역을 재개발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새롭고 세계적인 피터 테일러 스탠드 건설이 포함되어 있으며, 경기장 수용 인원은 38,000명으로 증가하여 이스트 미들랜즈에서 가장 큰 축구 경기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단은 2019-20 시즌 말에 공사를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계획 과정의 지연으로 인해 개발이 보류되었다. 2022년 9월, 러쉬클리프 자치구 의회의 계획 위원회는 구단의 계획 허가 요청을 승인했다.
3. 2. 역대 경기장
노팅엄 포리스트 FC는 1865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경기장을 사용해 왔다.기간 | 경기장 | 위치 |
---|---|---|
1865–78 | 포레스트 레크리에이션 그라운드 | 포레스트 필즈 |
1879–80 | 캐슬 그라운드 | 더 메도우스 |
1880–82 | 트렌트 브리지 크리켓 그라운드 | 웨스트 브리지퍼드 |
1882–85 | 파크사이드 그라운드 | 렌턴 |
1885–90 | 그레고리 그라운드 | 렌턴 |
1890–98 | 타운 그라운드 | 더 메도우스 |
1898– | 시티 그라운드 | 웨스트 브리지퍼드 |
4. 라이벌
노팅엄 포리스트 FC의 가장 치열한 라이벌은 14마일 떨어진 더비에 위치한 더비 카운티이다.[165] 이 라이벌 관계는 포리스트가 강력한 우승 후보 더비 카운티를 3-1로 꺾은 1898 FA컵 결승전에서 시작되었다. 두 클럽은 이스트 미들랜즈 더비를 치르며, 2007년 브라이언 클러프 트로피 제정 이후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2024년 2월 기준으로 두 클럽은 111번의 경기를 치렀으며, 포리스트가 43번, 더비가 38번 승리했고 30번은 무승부로 끝났다.[166]
레스터 시티는 브라이언 클러프가 더비와 포리스트에서 성공하기 전까지 포리스트의 주요 이스트 미들랜즈 라이벌로 널리 여겨졌다. 격렬함은 현재 레스터셔-노팅엄셔 경계 지역에 사는 팬들에게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포리스트의 다른 지역 라이벌은 인접한 사우스 요크셔에 기반을 둔 셰필드 유나이티드이며, 이 라이벌 관계는 1984–85년 영국 광부 파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사우스 요크셔의 광부들은 장기간 파업을 벌였지만, 투표를 고집했던 일부 노팅엄셔 광부들은 계속 일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합계 5-4로 승리한 두 클럽 간의 2003년 챔피언십 플레이오프 준결승전 또한 라이벌 관계에 불을 지폈다. 그들은 2022년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포리스트가 승리했으며, 2023-24 시즌에는 1993년 이후 처음으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만나 포리스트가 홈에서 2-1,[167] 원정에서 3-1로 승리했다.[168]
5. 선수단
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4 | DF | 모라투 | 브라질 |
5 | DF | 무릴루 | 브라질 |
6 | MF | 이브라힘 상가레 | 코트디부아르 |
7 | DF | 니코 윌리엄스 | 웨일스 |
8 | MF | 엘리엇 앤더슨 | 잉글랜드 |
9 | FW | 타이워 아워니이 | 나이지리아 |
10 | MF | 모건 깁스화이트 | 잉글랜드 |
11 | FW | 크리스 우드 | 뉴질랜드 |
12 | DF | 앤드루 오모바미델레 | 아일랜드 |
14 | FW | 캘럼 허드슨오도이 | 잉글랜드 |
15 | DF | 해리 토폴로 | 잉글랜드 |
16 | MF | 니콜라스 도밍게스 | 아르헨티나 |
17 | DF | 에리크 다 실바 모레이라 | 독일 |
18 | MF | 제임스 워드프라우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임대) | 잉글랜드 |
19 | DF | 알렉스 모레노 (애스턴 빌라에서 임대) | 스페인 |
20 | FW | 조타 실바 | 포르투갈 |
21 | FW | 안토니 엘랑가 | 스웨덴 |
22 | MF | 라이언 예이츠 (주장) | 잉글랜드 |
24 | FW | 라몬 소사 | 파라과이 |
25 | FW | 엠마누엘 데니스 | 나이지리아 |
26 | GK | 마츠 셀스 | 벨기에 |
28 | MF | 다닐루 | 브라질 |
30 | DF | 윌리 볼리 | 코트디부아르 |
31 | DF | 니콜라 밀렌코비치 | 세르비아 |
33 | GK | 카를루스 미겔 | 브라질 |
34 | DF | 올라 아이나 | 나이지리아 |
44 | DF | 잭 애벗 | 잉글랜드 |
5. 1. 현재 선수 명단 (2024년 8월 30일 기준)
2024년 8월 30일 기준 노팅엄 포리스트 FC의 현재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4 | DF | 모라투 | 브라질 |
5 | DF | 무릴루 | 브라질 |
6 | MF | 이브라힘 상가레 | 코트디부아르 |
7 | DF | 니코 윌리엄스 | 웨일스 |
8 | MF | 엘리엇 앤더슨 | 잉글랜드 |
9 | FW | 타이워 아워니이 | 나이지리아 |
10 | MF | 모건 깁스화이트 | 잉글랜드 |
11 | FW | 크리스 우드 | 뉴질랜드 |
12 | DF | 앤드루 오모바미델레 | 아일랜드 |
14 | FW | 캘럼 허드슨오도이 | 잉글랜드 |
15 | DF | 해리 토폴로 | 잉글랜드 |
16 | MF | 니콜라스 도밍게스 | 아르헨티나 |
17 | DF | 에리크 다 실바 모레이라 | 독일 |
18 | MF | 제임스 워드프라우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임대) | 잉글랜드 |
19 | DF | 알렉스 모레노 (애스턴 빌라에서 임대) | 스페인 |
20 | FW | 조타 실바 | 포르투갈 |
21 | FW | 안토니 엘랑가 | 스웨덴 |
22 | MF | 라이언 예이츠 (주장) | 잉글랜드 |
24 | FW | 라몬 소사 | 파라과이 |
25 | FW | 엠마누엘 데니스 | 나이지리아 |
26 | GK | 마츠 셀스 | 벨기에 |
28 | MF | 다닐루 | 브라질 |
30 | DF | 윌리 볼리 | 코트디부아르 |
31 | DF | 니콜라 밀렌코비치 | 세르비아 |
33 | GK | 카를루스 미겔 | 브라질 |
34 | DF | 올라 아이나 | 나이지리아 |
44 | DF | 잭 애벗 | 잉글랜드 |
5. 2. 임대 선수 명단
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 | GK | 맷 터너 | 미국 |
— | DF | 다비드 카르무 | 앙골라 |
— | DF | 조너선 팬조 | 잉글랜드 |
— | DF | 오마 리처즈 | 잉글랜드 |
— | MF | 루이스 오브라이언 | 잉글랜드 |
— | MF | 마르코 스타메니치 | 뉴질랜드 |
— | FW | 조시 볼러 | 잉글랜드 |
3 | DF | 누누 타바레스 | 포르투갈 |
29 | DF | 곤살로 몬티엘 | 아르헨티나 |
20 | MF | 조반니 레이나 | 미국 |
27 | FW | 디보크 오리기 | 벨기에 |
37 | FW | 호드리구 히베이루 | 포르투갈 |
'''아웃'''
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비고 |
---|---|---|---|---|
— | DF | 로익 음베 소 | 프랑스 | 알메레 시티 FC |
— | DF | 스코트 맥케나 | 스코틀랜드 | FC 코펜하겐 |
— | DF | 조나탄 판조 | 잉글랜드 | 스탕다르 리에주 |
— | DF | 조 워럴 | 잉글랜드 | 베식타스 JK |
— | DF | 오마르 리차즈 | 잉글랜드 | 올림피아코스 FC |
— | MF | 레모 프로일러 | 스위스 | 볼로냐 FC |
— | MF | 오렐 망갈라 | 벨기에 | 올랭피크 리옹 |
— | MF | 루이스 오브라이언 | 잉글랜드 | 미들즈브러 FC |
— | MF | 존조 셸비 | 잉글랜드 | 차이쿠르 리제스포르 |
— | MF | 브랜든 아길레라 | 코스타리카 | 브리스톨 로버스 FC |
— | FW | 조쉬 보울러 | 잉글랜드 | 카디프 시티 FC |
— | FW | 황의조 | 대한민국 | 알란야스포르 |
— | FW | 알렉스 마이텐 | 잉글랜드 | 포트 베일 FC |
— | FW | 에마뉘엘 데니스 | 잉글랜드 | 왓퍼드 FC |
5. 3. 기타 계약 선수
엠마누엘 데니스는 나이지리아의 축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루이스 오브라이언은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해리 아터는 아일랜드의 축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5. 4. B 팀 (U-21, U-18)
[173]번호 | 국적 | 포지션 | 이름 |
---|---|---|---|
36 | 골키퍼 | 조지 머레이-존스 | |
45 | 수비수 | 핀 백 | |
46 | 공격수 | 크리스티안 플레처 (D.C. 유나이티드에서 임대) | |
51 | 미드필더 | 셰이 카힐 | |
53 | 공격수 | 조 가드너 | |
55 | 미드필더 | 조쉬 파월 | |
58 | 미드필더 | 잭 퍼킨스 | |
59 | 미드필더 | 벤 페리 | |
60 | 미드필더 | 샘 콜린스 | |
61 | 골키퍼 | 해리 그리피스 | |
62 | 골키퍼 | 윌리엄 브룩 | |
63 | 골키퍼 | 애런 보트 | |
64 | 수비수 | 벤 해먼드 | |
65 | 수비수 | 저스틴 헹크스 | |
66 | 미드필더 | 잭 나딘 | |
67 | 수비수 | 잭 톰슨 | |
70 | 수비수 | 카일 맥아담 | |
71 | 미드필더 | 아치 화이트홀 | |
72 | 공격수 | 대니 아니스즈코 | |
73 | 미드필더 | 파루크 스미스 | |
76 | 수비수 | 지미 싱클레어 | |
81 | 골키퍼 | 키한 윌로우스 | |
82 | 골키퍼 | 테오 에이버리-브라운 | |
98 | 수비수 | 제이미 뉴턴 | |
99 | 미드필더 | 아담 베리 |
번호 | 국적 | 포지션 | 이름 | 비고 |
---|---|---|---|---|
수비수 | 아론 도넬리 |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임대 | ||
미드필더 | 제이미 맥도넬 |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임대 | ||
공격수 | 마니 노켓 | 첼트넘 타운 FC로 임대 | ||
공격수 | 에사파 오송 | 로더럼 유나이티드 FC로 임대 | ||
공격수 | 데일 테일러 | 위건 애슬레틱 FC로 임대 |
6. 코칭 스태프 및 경영진
훌리오 피게로아